우리 집안의 광산 김씨 자손 위치
o 이름 돌림자(항렬)
- 할아버지(永o : 37대)-아버지(o洙:38대)-나(容o:39대)-아들(o中:40)-손자(善o:41대)-증손(o淳:42대)-고손(東o:43대)-증고손(o煥:44대)-고고손(奎o:45대)
o 계보 :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도남공파(道南公派)
- 대파는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직장공파 등 5대 대파중 양간공파에 속하며
- 양간공파의 중파로는 전리판서공파, 판군기감사공파, 사온승공파, 판도판서공파,밀직부사공파, 참지정사공파 등 6개의 중파중 판군기감사공파에 속함
- 소파로는 판군기감사공파중에서 퇴촌공파에 속하며
- 또한,퇴촌공파는 충목공파, 정량공파, 담암공파, 집의공파, 도남공파, 판관공파,영흥판관 공파 등 7개 세파로 나누어지는데 이중 도남공파에 속함
- 따라서 우리 집안은 대파로는 충남논산의 숭덕사를 중심으로 한 양간공파이며, 중파로는 판군기감사공파이고, 소파로는 경기도 광주 퇴촌면을 중심으로 한 퇴촌공파이며, 마지막 세파로는 경상님도 합천을 중심으로 한 도남공파에 속함
광산(光山) 김(金)씨의 유래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新羅)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계(先系)는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金興光)이 신라의 왕자(王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國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 서일동(光州西一洞:현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學問)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先組)의 세거지(世居地)인 광산(光山:광주와 동일)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의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정2품의 벼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軾)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최고 관급)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에 책록되었다.
준(峻)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左僕?: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준의 아들 책(策)은 964년(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제도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어사대의 정6품이나 종 5품 또는 감찰사의 정6품 벼슬)를 거쳐 1043년(정종 9)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관직), 동년 11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에 속했던 정2품 관직)에 올랐다.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ㆍ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 병마사(西北路兵馬使)를 지내고, 1074년(문종 28) 태복경(太僕卿)으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베푼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외국에 보내던 사신)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1082년(문종 36) 좌복야(左僕?)에 올라 중서시랑 및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1087년(선종 4) 판상서 호부사(判上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약온(若溫)도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역임하였다.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일찍이 문과에 올라 23세에 조호부 도감판관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연천(蓮川)에서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쳐 공을 세워 1122년(예종 17)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이어 호부상서ㆍ 지출밀원사ㆍ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士: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였고 그의 아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諫議大夫:고려 문하부의 관직)와 비서감(秘書監:종3품 관직)을 역임하였다.
주정(周鼎)은 몽고군(蒙古軍)의 침입을 막아 권지병마녹사(權知兵馬錄事)에 오르고 1264년(원종 5) 에 문과에 장원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을 거쳐 1278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대린(大鱗)의 아들 연(璉)은 충렬왕(忠烈王)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東征:일본정벌)하려 할 때 출정을 앞둔 어느날 밤 차고 있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解夢)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敗戰)의 징후다”하고 출정장군(出征將軍)을 사퇴한 명신(名臣)으로 그후 첨의시랑(僉議侍郞)ㆍ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수(須)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년 (원종 12)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고려 최씨 집권 시대에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가 제주(濟州)로 몰려들자 안찰사(按察使) 권단(權㫜)의 명으로 2백 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1302년(충렬왕 28)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ㆍ황후 생일날에 축하하러 가던 사신)로 원(元)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황제가 모든 진공사(進貢使)는 모두 연경(燕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원나라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대궐을 멀리 떠나 거동할 때에 일시 머무는 곳)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君主)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사원(士元)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연의 아들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충숙왕(忠肅王) 때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忠惠王)이 원(元)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功)으로 사복시승(司僕?承)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올랐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 5)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도판서(版圖判書)ㆍ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충정왕(忠定王) 때 참의평리(參議平理) ㆍ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여 왕(王)이 그의 효성(孝誠)을 가상(嘉尙)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정표(旌表)를 세우게 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회조(懷租) 의 아들로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하고 의례(儀禮)에도 정통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黃州)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약시(若時)는 두문동 칠십 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이조순조(李朝純祖)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에 추증되었다.
국광(國光)은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에 등용되어 감찰ㆍ지평 등을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 의 난을 병조판서로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 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조(世祖)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고 우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 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軍) 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謙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세조(世祖)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軍器監正)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예몽(禮蒙)은 1432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와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등제하고 이조(吏曹) 및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大家) 장생(長生)은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 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예학(朝鮮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명이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1688년(숙종 14)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과 연산(連山)의 돈암서원(豚岩書院) 등 10개의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학문에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ㆍ집의(執義)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로 공서(功西: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장생(長生)의 아들 반(般)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 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仁祖) 때 대사성(大司成:정 3품)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이 포위되자 성(城)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軍)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司)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 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 (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ㆍ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74년 (현종 15) 예조참판(禮曹參判) 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 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유복자(遺腹子)로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ㆍ지평ㆍ수찬ㆍ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ㆍ삼남(三南:충청 남북도,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의 세 지방의 총칭)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1679년(숙종 5) 예조참의를 지내고 1685년(숙종 11)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후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 위해 전문을 한글로 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조선 초기 한호(韓濩)ㆍ양사언(楊士彦)ㆍ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家)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縣監)을 역임한 계문(季文)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불렀다. 어느날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뜻밖에 중종(中宗) 임금이 별감에게 술병을 들려 문앞에 서있자 놀라 엎드리니 중종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길 왔으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있으리오, 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 하도다” 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그 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ㆍ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덕령(德齡)은 붕섭의 아들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 성혼(成渾)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號)를 받아 1594년 (선조 27)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일본군(日本軍)의 호남 진출을 막았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다가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여 1661년(현종 2) 관작이 복구되고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 (정조 12)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고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判書)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 등은 가문의 기백을 굳건히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영덕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통탄하여 자결했으며, 일본(日本)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지수(志洙) 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더욱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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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대동항렬 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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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城譜, 丙子譜에 衣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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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은 아무나 마음대로 정(定)하는 것이 아니고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 때 일정한 대수의 항렬자(行列字)와 그 용법을 정해 놓아 후손들이 이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이를테면 부(父)는 이름자 윗자에 쓰면 자(子)는 아랫자로 순환 사용한다. 그러나 방계손이 많으면 파별(派別)로 따로 정하기도 한다(광산김씨의 문숙공파와 낭장공파의 경우) 그러나 우리 광산김씨 항렬자는 보편적으로 오전위 기준 즉, 오행법(五行法)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기준 반복법으로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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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같은 시기의 항렬은 長孫(장손=종가의 후손)계통일수록 낮고 支孫(지손=지파의 후손)계통 일수록 높아서,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존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포함된 글자를 변으로 하여 앞,뒤 이름자에 번갈아 쓰는 경우인데 대개 이를 가장 많이 따른다. •十干(십간)순으로 쓰는 경우:甲·乙·丙……壬·癸(갑·을·병……임·계)를 순차적으로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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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ㅇ澤) |
(相ㅇ) |
(箕ㅇ) |
(在ㅇ) |
(ㅇ鉉) |
(永ㅇ) |
(ㅇ洙) |
(容ㅇ) |
(ㅇ中)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善ㅇ) |
(ㅇ淳) |
(東ㅇ) |
(ㅇ煥) |
(奎ㅇ) |
(ㅇ鎔) |
(海ㅇ) |
(ㅇ植) |
(炯ㅇ) |
양 간 공 파 문 정 공 파 |
36世 : 鉉 |
37世 : 永 |
38世 : 洙 |
39世 : 容 |
40世 : 中 |
41世 : 善 |
42世 : 淳 |
43世 : 東 |
44世 : 煥 |
45世 : 奎 | |
46世 : 鑛 |
47世 : 淵 |
48世 : 植 |
49世 : 炯 |
50世 : 坤 | |
문 숙 공 파 |
36世 : 鎬, 錫 |
37世 : 源, 淳 |
38世 : 植, 榮 |
39世 : 熙, 光 |
40世 : 中, 聲 |
41世 : 善 |
42世 : 淳 |
43世 : 東 |
44世 : 煥 |
45世 : 奎 | |
46世 : 鑛 |
47世 : 淵 |
48世 : 植 |
49世 : 炯 |
50世 : 坤 | |
낭 장 공 파 |
36世 : 鉉 |
37世 : 洪 |
38世 : 植 |
39世 : 熙 |
40世 : 均, 圭 |
41世 : 熙 |
42世 : 圭 |
43世 : 鐘 |
44世 : 浩 |
45世 : 東 | |
46世 : 默 |
47世 : 載 |
48世 : 錫 |
49世 : 泰 |
50世 : 柱 | |
사 온 직 장 공 파 |
36世 : 鎬 |
37世 : 淳, 泳 |
38世 : 洙 |
39世 : 榮 |
40世 : 均, 圭 |
41世 : 鎰, 鍾 |
42世 : 承 |
43世 : 東 |
44世 : 然 |
45世 : 基 | |
46世 : 善 |
47世 : 漢 |
48世 : 來 |
49世 : 炯 |
50世 : 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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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사(崇德祠)-양간공 사우(良簡公 祠宇)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숭덕사(崇德祠)는 파조(派祖) 양간공(良簡公) 諱 연(璉)과 아들 정경공(貞景公)과 손자 장영공(章榮公)을 모신 사당(祠堂)이고, 숭모재(崇慕齋)는 양간공 위로 삼대(三代)를 제향(祭享)하는 재각(齋閣)이다.
숭모재(崇慕齋)는 1986년 건립되었는데, 외삼문(外三門)과, 전사청(典祀廳)인 고직사(庫直舍)가 있고, 숭덕사(崇德祠)는 후손들의 성금으로 2004년 陰 3월 1일 기공(起工)하여 당년(當年) 말(末)에 완공(完工)하니, 사당(祠堂) 13.5평, 내삼문(內三門) 3.5평이다.
2005년 陰 3월 1일 양간공(良簡公)을 봉향(奉享)하고, 2006년 陰 3월 1일 정경공(貞敬)과 장영공(章英公)을 추배(追配)하였고, 2008년 2월 묘정비(廟庭碑)를 근수(謹竪)하였다.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영간공후 판군감사기공파의 세계도(世系圖)]
양간공후 판군기감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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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조상묘소(조부모 및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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